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국을 떠난 지 25년만에 한국을 찾은 안익태선생은 그 후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 위해 두 번째로 조국의 땅을 밟았고 그 후 3회까지 국제음악제는 계속되었다. 해방된 조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빙하여 음악을 활성화시키고 바람직한 오케스트라 운동을 통해 음악의 생활화를 국민의 마음속에 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포부는 대담성과 스스로 흥분감속에서 이 일들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오랜 동안 외국생활에서 몸에 밴 서양적인 사고 방식과 무언가 국내 음악인들을 무시하는 것같은 섭섭함들로 인해 제4회 국제음악제는 무산되고 말았고 이 때에 선생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세계가 나를 환영하는데 왜 조국엔 내가 설 땅이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필생의 역작으로 교향시「계림」을 착상하고 이를 위해 실제로 경주와 해인사 등을 방문, 전 4악장으로 된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모두가 물거품처럼 살아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활약하던 안익태 선생이 조국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지 못하고 가신 점이다. 청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생의 멋진 지휘를 좀 더 분명히 느끼고 싶은 마음 간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60을 마저 채우지도 못한 채 가버린 것이다.
그는 비록 조국을 떠나 있었어도 자신이 지휘봉을 들 때마다 한국 환상곡을 연주하며 이 지구상에 분명히 한국이 있음을 밝혔고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말로 애국가를 소리 높여 외치도록 하고야 말았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 당시 독재자 뭇솔리니의 치하에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압력을 가해 안선생을 추방토록 했는가 하면, 그가 가는 곳마다 일제의 마수는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그를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생전에 그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에서의 생활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이역의 하늘 아래서 눈을 감긴 했어도 그의 예술적 유산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으며 이제는 국립묘지에 고이 안장되어 세상을 떠났을 망정 고국에 묻히었으니 영혼이나마 평안하기를 빌 따름이다.
한 많은 조국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얼,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한민족의 힘찬 의지를 담아 작곡한「한국환상곡」은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충성의 표증이며, 스페인에 살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수한 투철한 한국 국민으로서의 신념은 우리민족 모두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1991년 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