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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삶과 사상

애국가라는 말은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뜻이니 만큼 누구나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만들어 애국가라고 이름을 부치면 애국가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국가가 아니었던 음악이 후에 국가가 된 예도 많은데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이예츠」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국가로 쓰고 있는 애국가도 사실은 왜정시대때 만들어진 약 20여종의 애국가 가운데 하나로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불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그 중의 하나가 현재의 애국가로 쓰여지게 된 것이다.

초창기의 애국가들은 한 집단이 필요에 의해 가사를 만들어 함께 노래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워진 노래는 현재 영국 애국가 선율과 스코트랜드 민요인 「올드랭 사인」의 선율이었다. 안선생이 처음 애국가를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때였는데 애국가의 가사에 「올드랭 사인」의 선율을 부쳐 노래하는 것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이 때의 감동이 후일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안창호 선생으로 들었고 같은 안씨라는 점에서 더욱 애착을 가졌다고 했으나 현재의 연구결과로는 윤치호 선생의 작사설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안선생은 그 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처음 찾아간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펄럭이는 태극기와 특히 예배가 끝난 후 모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번 애국가를 작곡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심을 전해들은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는 애국가의 4절까지가사를 적어 주고는 만년필까지 선물하면서 꼭 이 가사에 곡을 부쳐 주기를 당부했다.

애국가를 완성한 안익태 선생은 사본을 만들어 미국의 교민회로 보내어 동포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왜정하에 있던 고국에서는 마음대로 애국가를 부를 수 없어 광복후에도 국내에서는 올드랭 사인에 미루어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948년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하면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고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지금도 국가로 우리들 가슴속에 나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그런데 십여년전 음악계의 일각에서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불가리아의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결국 이 문제는 음악의 기법이라든가 또 당시 안선생이 아직 불가리아로 여행하기 이전에 이미 애국가가 작곡된 점등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국가란 음악적 완성도를 따지기 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감격속에 이를 부를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특히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의 응어리를 안고 있는 우리의 애국가는 이제 영원히 태극기와 더불어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

(이 글은 1991년 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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