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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 5일 |
평양출생 (평양시 계리 35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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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평양 종로보통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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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1938년 3월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될 때까지 숭실대학에 악적(樂籍)을 두고 바이올린 독주회(1922년/1923년)와 첼로 독주회(1928년/1930년)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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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
3.1운동 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 후 일제에 의해 숭실중학교 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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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숭실중학교 4번타자 겸 2루수로 출전해 준우승 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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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3월 |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 첼로 특기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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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
도쿄 구니타치 음악대학 입학(첼로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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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
도쿄 구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일본유학 당시와 이후에도 창씨개명 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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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9월 3일 |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착, 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 교인들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선율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새로운 애국가 작곡 결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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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9월 18일 |
신시내티 음악원 장학생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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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장학생 입학, 템플대학교 신문학과에 재학 중인 한흑구(1909-1979)가 주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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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35년 |
필라델피아 심포니클럽과 앱나키캠프 관현악단, 체스트넛 힐 장로교회 성가대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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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미국 엘칸-보걸사에서 <한국음악의 첫 선언> 모음곡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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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
미국에서 애국가 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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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2월 28일 |
시카고 한인교회에서 애국가 첫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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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월 |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에서 애국가 악보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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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4일 |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문출판물 압수목록에 오르며 안익태의 애국가 연주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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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6월 |
첫 유럽여행 중 베를린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파울 힌데미트(1895-1963) 면담, <강천성악>을 작곡 중이라 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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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
빈에서 오스트리아의 대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와 만남, 그의 추천으로 9월 11일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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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0월 |
뉴욕으로 돌아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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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6월 |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음악학 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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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1월 |
뉴욕에서 영국으로 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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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2월 20일 |
아일랜드 더블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한국환상곡> 세계초연,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독립 염원 피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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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월 |
헝가리 부다페스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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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6월 27일 |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을 상대로 <한국환상곡> 수정판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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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16일 |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 장학생 입학, 헝가리 민족음악의 대부 졸탄 코다이(1882-1967)에게 작곡 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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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12월 |
리스트 음악원을 방문한 독일 후기낭만파 최후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와 첫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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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
제2차세계대전 발발, 유럽정세 급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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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4월 30일 |
로마에서 로마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한국환상곡> 연주, <강천성악>을 당시 국제정세상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제목으로 세계초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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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27일 |
베를린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군사동맹조약인 3국동맹 체결,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노골화된 유럽에서 ‘한국’이란 제목의 작품 공연금지, 일제의 강요로 일본편향 연주회가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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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 20일 |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안익태 작곡 애국가를 일제치하 한국의 공식국가로 승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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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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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연말 |
부다페스트에서 베를린으로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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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12일 |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독일-일본협회 빈 지부가 주최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 지휘, 리스트의 마지막 피아노 제자인 명피아니스트 에밀 폰 자우어(1862-1942) 협연의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스승 슈트라우스가 일본정부의 위촉으로 1940년 작곡한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축전곡> 지휘, 공연 후 객석에 있던 슈트라우스가 안익태에게 친필 헌정서 증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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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18일 |
구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식연주회를 동양인 최초로 지휘, <한여름밤의 음악회>라는 데뷔무대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 서곡과 자신의 <에텐라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피아노 협연 다그마르 벨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지휘, 프로그램에 일본의 속국 조선 평양 출신이라고 명기하며 민족정체성을 피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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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14,18,21일 |
파리 살 플레이엘에서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베토벤 페스티벌> 지휘,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1880-1953)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 등 당대의 명연주자들이 협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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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4년 |
제2차세계대전 중의 유럽에서 유럽 저명악단 다수 지휘, 3국동맹과 전시체제하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환상곡>의 다른 이름인 <교쿠토=극동>과 <토아=동아>, <만주환상곡> 및 <에텐라쿠> 등장,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교쿠토> 연주회 프로그램에 한국의 선율을 주제로 작곡했다는 해설을 명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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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12일 |
전쟁을 피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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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 |
바르셀로나에서 1944년판 <한국환상곡>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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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5,22일 |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1944년판 <한국환상곡> 초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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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5일 |
바르셀로나 수도원에서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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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1월 |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단 후 초대 상임지휘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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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14일 |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단연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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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9일 |
대한민국 제헌국회 제61차 본회의에서 안익태 작곡 애국가를 통일의 그날까지 대한민국 국가에 준하는 독점적 공식국가로 인정한다고 의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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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31일 |
교향시 <마요르카> 초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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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 8일 |
85세를 일기로 스승 슈트라우스 타계, 1938년 부다페스트에서의 첫 만남 이후 12년 간 교분, 1942년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 슈트라우스의 유일한 동양인 제자로 8년 간 작곡/지휘 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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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7일 |
최초의 한국여권 발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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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25일 |
교향시 < 포르멘토르의 소나무> 초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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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20일 |
멕시코 국립대학교 음악대학 교향악단 지휘, <한국환상곡>과 <강천성악> 지휘, 중남미 데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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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2월 31일 |
신시내티 교향악단 송년음악회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며 미국 데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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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19일 |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축하공연을 위해 25년 만에 금의환향, 문화포장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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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월 12일 ~1958년 3월 28일 |
미국 순회공연, 미국 내 다양한 악단들을 지휘하며 <한국환상곡> 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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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5월 30일 |
마요르카 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고별무대,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오케스트라 등 스페인의 유력악단과도 고별연주회, 이후 전세계 주요악단의 객원지휘자로 활동반경 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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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6일 |
영국 최고악단인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한국환상곡>과 베토벤, 드보르자크 작품 연주, 영국 데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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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9월 ~ 1962년 11월 |
중남미 순회공연, <한국환상곡>과 <강천성악> 등을 지휘하며 대한민국의 문화사절로 기여, 이후 연쇄적인 중남미 국가들과의 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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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7일 ~ 3월 5일 |
간사이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오사카, 교토, 고베 순회공연, <한국환상곡>의 대단원인 애국가를 일본합창단이 한국어로 합창, 일본 데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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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9일 |
이승만 대통령 85세 탄신축하공연 지휘를 위해 두 번째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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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15일 |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강천성악> 및 베토벤, 차이콥스키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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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2일 |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한국환상곡>과 스승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 등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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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26일 |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등 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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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1~16일 |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 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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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5월 1~15일 |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 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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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19~26일 |
제3회 서울국제음악제 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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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7월 31일 |
일본 음악지우사(音樂之友社)가 슈트라우스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집필 의뢰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기>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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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26~27일 |
도쿄올림픽 폐막연주회 지휘, 신도쿄 교향악단을 이끌며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등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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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4월 10일 |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 일본인들의 반대에도 자신이 작곡한 교향시 <논개> 지휘를 강행, NHK방송 생중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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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4일 |
영국 최고악단인 런던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최후의 연주회, <논개>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해럴드 콘 협연),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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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월 16일 |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향년 59세를 일기로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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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15일 |
문화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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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 8일 |
유해봉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2유공자 묘역에 안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