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기법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달리 할말이 있겠으나 안선생이 이 곡을 통해 나타내려고 한 정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한국환상곡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음으로 표현한 장대한 민족의 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음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울림은 우리나라의 탄생을 알리는 팡파르이며 이어서 ‘호른’의 평화로운 가락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모습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의 얼을 표출하고 있다. 이를 받아 다시 ‘플륫’이 한국적 가락을 노래하면 이를 금관악기가받아 타령조로 변하며, 이는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우리의 농부들이 추수한 후 기쁨을 함께 나누는 흥겨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귀에 익은 도라지타령도 나타나 쉽게 음악속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 고유민요의 가락이 끊어지며 투쟁이 시작된다.

3.1운동이 표현될 때는 때로 애국가의 가락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계속되지 못한 채 끊어지며 암울한 일제시대의 시련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드디어 가락은 조용한 진혼곡으로 바뀌며 독립운동에 의해 희생된 선열들의 넋을 위로한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이어 받은 우리민족은 다시 분열이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며 드디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안익태 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의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 소리 높이 울려 퍼질 때 그 감격은 말할 수 없는 떨림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도 잠깐 또다시 한반도는 6.25동란으로 인한 전환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뀐다. 기쁨 후에는 슬픔이 있고 밤이 지나가면 낮이 온다는 말과 같이 역사는 계속해서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인가 6.25 동란의 아픔도 과거의 것으로 묻히었고 드디어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깊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 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더불어 장엄하게 곡은 끝난다.

애국가라는 말은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뜻이니 만큼 누구나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만들어 애국가라고 이름을 부치면 애국가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국가가 아니었던 음악이 후에 국가가 된 예도 많은데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이예츠」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국가로 쓰고 있는 애국가도 사실은 왜정시대때 만들어진 약 20여종의 애국가 가운데 하나로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불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그 중의 하나가 현재의 애국가로 쓰여지게 된 것이다.

초창기의 애국가들은 한 집단이 필요에 의해 가사를 만들어 함께 노래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워진 노래는 현재 영국 애국가 선율과 스코트랜드 민요인 「올드랭 사인」의 선율이었다. 안선생이 처음 애국가를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때였는데 애국가의 가사에 「올드랭 사인」의 선율을 부쳐 노래하는 것을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아 이 때의 감동이 후일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안창호 선생으로 들었고 같은 안씨라는 점에서 더욱 애착을 가졌다고 했으나 현재의 연구결과로는 윤치호 선생의 작사설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안선생은 그 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처음 찾아간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펄럭이는 태극기와 특히 예배가 끝난 후 모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번 애국가를 작곡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심을 전해들은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는 애국가의 4절까지가사를 적어 주고는 만년필까지 선물하면서 꼭 이 가사에 곡을 부쳐 주기를 당부했다.

애국가를 완성한 안익태 선생은 사본을 만들어 미국의 교민회로 보내어 동포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왜정하에 있던 고국에서는 마음대로 애국가를 부를 수 없어 광복후에도 국내에서는 올드랭 사인에 미루어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948년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하면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고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지금도 국가로 우리들 가슴속에 나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그런데 십여년전 음악계의 일각에서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불가리아의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결국 이 문제는 음악의 기법이라든가 또 당시 안선생이 아직 불가리아로 여행하기 이전에 이미 애국가가 작곡된 점등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국가란 음악적 완성도를 따지기 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감격속에 이를 부를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특히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의 응어리를 안고 있는 우리의 애국가는 이제 영원히 태극기와 더불어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

(이 글은 1991년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국을 떠난 지 25년만에 한국을 찾은 안익태선생은 그 후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 위해 두 번째로 조국의 땅을 밟았고 그 후 3회까지 국제음악제는 계속되었다. 해방된 조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빙하여 음악을 활성화시키고 바람직한 오케스트라 운동을 통해 음악의 생활화를 국민의 마음속에 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포부는 대담성과 스스로 흥분감속에서 이 일들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오랜 동안 외국생활에서 몸에 밴 서양적인 사고 방식과 무언가 국내 음악인들을 무시하는 것같은 섭섭함들로 인해 제4회 국제음악제는 무산되고 말았고 이 때에 선생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세계가 나를 환영하는데 왜 조국엔 내가 설 땅이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필생의 역작으로 교향시「계림」을 착상하고 이를 위해 실제로 경주와 해인사 등을 방문, 전 4악장으로 된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모두가 물거품처럼 살아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활약하던 안익태 선생이 조국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지 못하고 가신 점이다. 청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생의 멋진 지휘를 좀 더 분명히 느끼고 싶은 마음 간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훌쩍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60을 마저 채우지도 못한 채 가버린 것이다.

그는 비록 조국을 떠나 있었어도 자신이 지휘봉을 들 때마다 한국 환상곡을 연주하며 이 지구상에 분명히 한국이 있음을 밝혔고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말로 애국가를 소리 높여 외치도록 하고야 말았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 당시 독재자 뭇솔리니의 치하에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압력을 가해 안선생을 추방토록 했는가 하면, 그가 가는 곳마다 일제의 마수는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그를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생전에 그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에서의 생활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이역의 하늘 아래서 눈을 감긴 했어도 그의 예술적 유산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으며 이제는 국립묘지에 고이 안장되어 세상을 떠났을 망정 고국에 묻히었으니 영혼이나마 평안하기를 빌 따름이다.

한 많은 조국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얼,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한민족의 힘찬 의지를 담아 작곡한「한국환상곡」은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충성의 표증이며, 스페인에 살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수한 투철한 한국 국민으로서의 신념은 우리민족 모두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1991년8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인물로 지정하고 작성한 것으로 한상우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