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1안익태
Ahn, Eak-Tai 1906. 12. 5 – 1965. 9. 16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고, 바이올린과 트럼펫의 연주를 배우며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평양 종로보통학교 시절에는 정규 음악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줄 아는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1918년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된다. 안익태의 음악재능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모리스 마우리 박사(1880-1971)였다. 그는 1909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서양음악을 알린 선구자였다. 안익태는 숭실중학교 시절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첼로공부를 시작했지만, 서울의 조지 그레그를 찾아가 전문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원하던 음악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숭실중학교 시절은 길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숭실학교는 평양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안익태는 3.1운동 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지목대상이 되어 숭실중학교 퇴교처분을 받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우리 박사는 안익태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안익태는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서 첼로 특기자로 수학한 후, 1926년 도쿄 구니타치 음악대학에 진학하여 전문 첼로연주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30년 구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후 일시 귀국하여 수차례의 첼로독주회를 연 안익태는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안익태는 일본유학 당시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한 진정한 애국자였다. 세간에서 일본식 이름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에키타이 안이란 표기는 안익태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어의 받침 발음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이 안익태 본인이 발음한 안익태, 영문으로는 안익크타이(Ahn Eaktai)를 안에키타이(Ahn Ekitai)라고 임의로 받아쓴 결과였다. 이것이 역시 받침을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서양인들에게도 용이한 발음표기로 받아들여져 에키타이 안으로 통용되었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는 에키타이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신시내티에 당도한 안익태는 그 해 9월 신시내티 음악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1933년 2월에는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에 역시 장학생으로 편입한다. 이 시기 대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관람은 지휘에 눈뜨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안익태는 스토코프스키의 권유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습단원으로 입단하여 값진 경험을 쌓았다.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필라델피아 심포니클럽과 앱나키캠프 관현악단 및 체스트넛 힐 장로교회 성가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지휘의 기초를 쌓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5년 엘칸-보걸사의 의뢰로 <한국음악의 첫 선언> 모음곡을 출판한 안익태는 첼리스트, 지휘자, 작곡가로 분방하게 활동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도착 당시부터 염두에 둔 <애국가>의 작곡을 완성한다. <애국가>의 악보는 이후 미국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된다.

193photo26년 6월 학업을 보류하고 유럽행에 오른 안익태는 빈에서 오스트리아의 대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와 만남을 갖는다. 재능을 인정한 바인가르트너의 추천으로 안익태는 1936년 9월 11일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지휘한다. 이것이 안익태의 유럽 데뷔무대였다. 바인가르트너는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지휘자이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1930년대 세계 최초로 녹음한 베토벤 해석의 최고 거장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안익태는 1937년 6월 템플대학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이후 1937년 11월 뉴욕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안익태는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더블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한국환상곡>을 세계초연한다. 같은 해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안익태는 1941년 10월 졸업할 때까지 3년 간 헝가리의 대작곡가 졸탄 코다이(1882-1967)로부터 작곡을 사사한다.
독일 후기낭만파 최후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와의 첫 만남도 1938년 4월에서 12월 사이 슈트라우스가 리스트 음악원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42년 3월 12일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안익태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난 후, 객석에 있던 슈트라우스가 안익태의 지휘실력을 깨끗이 인정한다고 쓴 친필편지가 전해진다. 이때로부터 1949년 9월 8일 슈트라우스가 타계할 때까지 8년 간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유일한 동양인 제자로 작곡/지휘를 사사했다.
슈트라우스의 지지와 추천으로 유럽 내 저명악단 다수를 지휘한 안익태는 1946년 여름,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한다. 1946년 11월에 창단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는 등 안익태는 스페인에 완전히 정착한다. 조용한 섬 마요르카에 머물며 지휘와 작곡에만 몰두하던 안익태가 다시 세계무대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고국의 현실이 몹시도 괴로웠던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개작해 다시 무대에 올린다. 개정판 <한국환상곡>으로 1952년 최초의 멕시코 순회연주와 1953년 신시내티 교향악단 송년음악회를 지휘하는 등 안익태는 조국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마침내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세 기념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해 25년 만인 1955년 3월 안익태는 귀국한다. <애국가>의 작곡가로 사반세기만에 금의환향한 안익태는 최초의 문화포장을 받는다.
이후 1959년 5월 마요르카 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 안익태는 전세계 유수악단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객원지휘활동에 나선다.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럽과 미국, 중남미와 일본, 대만, 필리핀의 주요악단을 두루 지휘하게 된다. 1960년 3월에는 이승만 대통령 탄신 85세 기념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해 5년 만에 귀국했고, 1961년 12월 다시 한국을 찾아 박정희 의장을 예방했다. 면담을 통해 <서울국제음악제>를 추진하게 되었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매년 5월에 음악제를 주관했다.
안익태는 서울국제음악제 개최와 함께 국립교향악단 창설, 국립음악학교 설립 등 국내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당시부터 병세의 조짐이 완연했다. 1965년 5월 제4회 서울국제음악제가 무산되면서 충격을 받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안익태는 한층 심각한 병세를 보였다. 같은 해 7월 4일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영국 최고악단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이 마지막 무대였다. 심한 고열과 통증에도 런던 연주회를 강행한 안익태는 간경화 진단을 받았고, 약 2개월 후인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영면했다. 그 해 5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고국을 떠난 안익태의 갑작스런 죽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애통해 했다. 정부는 안익태의 공로를 인정하여 사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 후 안익태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지속적으로 유해봉환사업을 펼친 결과, 사후 12년이 흐른 1977년 7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