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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안익태 서거 50주년’ ‘애국가 80주년 기획’ [1] 뜨거웠던 생애 재조명 (2015.05.26)

관리자 2024-12-31 조회수 43

죽음 문턱에서도 지휘봉은 놓지 않았다

[일요신문] 을미년 2015년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다. 더불어 우리의 국가 애국가가 작곡된 지 80년이 된 해이기도 하다. 이에 <일요신문>은 기획 시리즈로 안익태 선생의 ‘삶과 애국가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안익태 선생의 뜨거웠던 생애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봤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유명한 작곡가로 자리매김했지만 고국에 대한 사랑을 음악의 최종 목표로 삼았던 안익태 선생. 그가 세계적인 작곡가로 우뚝 서기까지는 고난도 상당했다. 안익태 선생의 일대기를 심층 취재했다.

 

안익태는 1965년 7월 생애의 마지막 무대가 된 런던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하는 동안에도 심한 고열과 통증에 시달렸다.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병원으로 직행한 그는 과로로 인한 간경화증 진단을 받고 2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다 9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눈을 감았다.

“여보. 난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움을 느꼈소. 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고, 언제나 고생을 참고 견디면 이에 대한 보상이 있게 마련이거든. 당신도 내가 한국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지.”


1955년 봄, 49세의 안익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오케스트라단 앞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 ‘안익태 귀국환영 특별연주회’가 열렸던 것. 이미 유럽에서 수많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안익태이지만 한국에서의 연주회는 유난히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다. 부인 롤리타 안 여사는 이런 남편의 감격적인 소감에 깊이 공감하며 미소를 띠었다.


안익태에게는 문득 20여 년 전 청년 시절이 스쳐지나갔다. 1930년 가을. 커다란 첼로 가방과 작은 보따리를 들고 미국에 갓 도착한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를 찾았다. 한인교회 목사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안익태가 도착한 날 저녁, 한인교회에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잉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이 피아노 반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도 20명이 기립해 애국가를 불렀다. 예배당 한쪽에 있는 작은 태극기, 눈물에 젖은 애국가는 안익태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했다. 목사의 소개로 강단에 오른 안익태는 첼로를 꺼내들어 올드 랭 사인을 다시 연주했다. 갑작스런 눈물이 안익태의 시야를 가렸다. 청년 안익태에게 교민들은 유학생활에 보태라며 67달러 30센트를 모금해 쥐어줬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신시내티 음악원에 입학한 안익태에게 교민들의 애국가는 잊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의 이별 노래가 애국가 곡조로 불리는 게 치욕처럼 느껴졌다. “부끄럽지 않는 대한의 애국가를 언젠가 작곡하겠다”는 결심이 굳혀졌다. 그리고 불과 5년 만에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직접 작곡하기에 이른다. 


“너 누구냐? 연습도 하지 않고 덤벼들다니 안 돼. 물러가.”


1934년 미국 버몬트주 챔플린 호숫가에서.

시간은 다시 과거로 거슬러 1926년 동경국립음악학교로 향한다. 음악학교의 교내 오케스트라. 첼로 파트에 결원이 생겨 안익태가 지원했지만 상급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 하급생인 안익태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태연한 표정을 짓던 안익태는 지휘자의 닦달이 극에 달하자 비로소 고개를 들고 간청했다. “연습은 집에서 벌써 했습니다. 악보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저를 입단시켜 주십시오.” 안익태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지휘자는 안익태의 대담하고 진지한 태도에 “오케이, 입단이다”라고 속 시원하게 선언해 버렸다. 안익태와 지휘자 고노에 후미나로(1937~39, 40~41년 일본 총리)의 첫 만남이다. 후에 유럽무대에서 안익태는 고노에의 경쟁상대로 성장하며 결국 고노에를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오케스트라 입단을 겁 없이 들이댄 대범함과 더불어 연습을 끈질기게 하는 근성은 학교에서 유명했다. 멀리 사는 친한 친구가 안익태를 보기 위해 3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와서 도쿄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안익태는 “미안하지만 잠시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나”하고는 방에 들어가서 첼로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은 무려 2시간이나 진행됐다. 이후 방문을 나온 안익태는 멋쩍은 얼굴로 친구에게 말한다. “미안하네. 내가 정해놓은 연습시간을 깨뜨릴 수 없었네.”


도쿄 유학시절 경제적인 문제도 안익태의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카페에서 첼로 연주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는 안익태는 곧바로 지원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실수 연발, 몇 마디 연주도 못하고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안익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대기자 뒷줄에 서서 또 오디션을 봤다. 카페 주인이 “이미 불합격된 사람의 연주는 들을 필요가 없다”라며 퇴짜를 놓으려 하자 안익태는 “한 번만 더 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간청을 못이긴 카페 주인은 안익태의 재 연주를 듣고 급기야 합격을 시켰다. 안익태의 근성은 이처럼 유별났다. 후에 애국가를 작곡할 때까지 그의 끈질긴 연습과 근성은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1943년 부다페스트 지휘를 마치고 열차에서.

일본과 미국 유학생활을 거쳐 안익태는 유럽행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미국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작곡하고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에 일이다. 당시 유럽은 나치정권이 만연하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음악가 안익태’는 이런 격변의 시기에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작은 당대 유럽 최고 지휘자로 꼽히는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법을 배우면서부터다. 이윽고 30살의 안익태는 바인가르트너의 추천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행운을 얻는다. 그가 지휘하는 연주는 방송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격찬 환호를 받았다. 

 

 

운명의 스승인 독일의 대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난 것도 이즈음이다.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우며 자질을 인정받은 안익태는 이후 날개를 단 듯 각국을 돌아다니며 파리 콩세르, 런던 로열필하모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베를린 필하모니 등 200여 유명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대가로 우뚝 선다. 

 

운명의 스승인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국내에서도 이런 안익태의 모습을 주목했다. 세계무대에 한국인을 각인시킨 박지성, 김연아보다 반세기 이전에 안익태가 있었다. 1940년 4월 23일 <동아일보>는 ‘세계적 컨덕터(지휘자) 안익태 교수’라는 제목으로 “음악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로마 방송교향악을 지휘할 터인데 이것은 전 세계 각국까지 중계방송을 하기로 되었다 한다. 연주 장소가 장소인 만큼 세계 악단의 관심과 기대는 더욱 높다 하며, 특히 연주곡목 중에는 조선 정서가 무르녹는 조선곡도 있다 한다”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로마에서 안익태가 지휘한 한국환상곡은 유럽 전역으로 울려 퍼지며 극찬을 받았다. 


다시 1955년 봄. 안익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으로 입국했다. 고국을 떠난 지 25년 만의 일이다. 대통령 관저 앞 5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오케스트라가 안익태의 지휘 하에 애국가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안익태는 이례적으로 관중을 향해 돌아서서 지휘봉을 높이 든다. 5만 명의 사람들은 안익태의 지휘 하에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안익태와 오만 명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 가득 찼다. 


이후 안익태는 한국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공연을 했다. 1962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나 고국에서 ‘국제음악제’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해 정부의 승인을 받는다. 안익태의 국제음악제는 1964년 제3회 대회까지 개최된다. 하지만 제4회 대회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끝내 무산이 되기에 이른다. 


이윽고 1965년 여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머문 안익태는 연주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된다. 구두를 벗는데 그의 두 발이 퉁퉁 부어 있었던 것. 주치의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조언했으나 안익태는 “한 달 후에 있을 런던 연주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고집대로 런던 알버트 홀 무대에 선 안익태.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지휘할 때쯤 그는 이미 고열과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반부가 끝난 후 대기실에서 괴로워하던 그는 주변에 만류에도 연주회를 끝까지 마무리했다. 뜨거운 박수를 뒤로하고 안익태는 병원으로 직행했다. 안익태의 상태를 살펴 본 의료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명은 과로로 인한 간경화증. 살날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고 의료진은 판단했다. 


결국 안익태는 두 달 동안 투병했지만 1965년 9월 16일 새벽, 바르셀로나의 작은 병실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59세. 애국가와 함께 그의 뜨거웠던 음악 생애는 그의 묘소의 남겨진 비문처럼 아득하게 막을 내렸다. 


‘꽃시절 삼천리를 등지고 / 먼먼 땅으로 떠났던 사람 / 하는 그 하늘 아득한 이국에서 / 젊음의 향수(鄕愁)를 악보에 옮기며 … 교향곡으로 겨레를 부르고 껴안았으니 / 이 푸른 세월 속에 그가 가지 않았노라 / 넋이여! 들으소서 민족의 한 목소리를 / 정든 땅에 울려 퍼지는 영원한 애국가를’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27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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