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헌수 (숭실사이버대학교 총장, 전 안익태기념재단이사장)
1. 안익태기념재단의 연혁
<안익태기념재단>의 설립은 1990년 미망인 로리타여사 가족이 살던 스페인 마요르카 소재 집을 처분할 수 밖에 없는 정도의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얘기를 주 스페인 한국대사가 한국일보를 통해 국내에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페인에서 사업하던 권영호씨가 1990년 11월 그 집을 구입하고 수리하여 우리 정부 외교부에 기증하면서 유족들이 계속 거주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족들은 애국가의 저작권은 우리정부에 기증하였습니다.
이어 1992년 8월 당시 대통령이 안익태선생의 ‘유가보전대책’ 강구를 지시하여 <한국일보>에서 국민 성금을 모금했고 이를 계기로 그해 10월 안익태 기념사업 재단 설립 창립총회를 열어 초대 이사장에 전봉초 서울음대학장이 취임하였고 이후 사회 명사들이 이사장을 맡다가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숭실대학교 총장이 이사장으로 수고하였고 이후 다시 사회명사들이 이사장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도 2013년부터 17년까지 숭실대 총장으로 재임할 당시 본 재단의 이사장을 감당한 연고입니다. 지금은 솔그룹 임행식회장이 이사장이십니다.
그동안 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안익태기념음악회를 매년 개최하는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추모 사업을 통해 모든 국민이 애국가를 사랑하고 조국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업들을 진행해왔습니다.
이를 위해 본 재단은 안익태 선생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고, 안익태 기념관 및 기념음악당 건립과 공원 조성 추진사업, 애국가 선양 포상, 악보정비 및 악보집 출판, 신진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 발굴사업, 안익태 기념 학술대회, 안익태 지휘 아카데미, 그리고 안익태를 기념하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화합의 장으로 매년 안익태 기념음악회 개최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제가 발표하는 내용은 안익태선생의 공과를 따지기보다 그의 신앙적, 애국적, 그리고 음악적 수고와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2. 안익태가 접한 기독교
안익태의 생애는 크게 5개의 시기로 구분됩니다. 1906년 출생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성장기, 1921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지내던 일본에서의 학업을 마친 1930년까지의 일본유학기,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과 연주활동을 하다가 1938년 유럽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미국유학활동기, 1938년 유럽으로 건너가 시트라우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휘자로서 활동하다가 1944년 스페인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유럽활동기, 그리고 1944년 스페인에 정착하여 결혼하고 활동하던 스페인거주활동기입니다.
그가 기독교를 접하고 음악을 배운 것은 그의 성장기입니다.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이 되었을 때 혼자 교회에 찾아가 찬송가를 부르면서 음악을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풍금과 서양 악보를 접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찬송가에 끌려 기독교 신앙 속으로 깊이 빠져들면서 바이올린과 트럼펫의 연주를 배우며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습니다. 평양 종로보통학교 시절에는 정규 음악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줄 아는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3세 때던 안익태는 1918년 평양 종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 스쿨인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됩니다. 숭실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성경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특별한 음악 재능을 알아 본 숭실전문학교 교장인 선교사 모리스 마우리 박사는 그를 숭실전문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입단시켰습니다. 그는 1909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숭실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서양음악을 알린 선구자였습니다. 특히 이 시절 안익태는 기독교 음악에 심취하여 그의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가 찬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때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어떤 시골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안익태를 예배에 초대하여 복음 찬송가 연주회를 열었을 정도로 그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마우리 박사는 안익태를 음악가로 대성할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가 숭실중학교 2학년 되던 해 그를 서울 YMCA에 설치된 성경학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캐나다 선교사 죠지 그래그 목사에게 개인교습을 받게 해줍니다.
서울 YMCA에서 선교사와 합주도 하고 YMCA 밴드와 실내 음악회도 열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나 이 성경학교에서 안익태가 아침저녁으로 쉴 새 없이 첼로 연주 연습에 몰두하자 다른 학생들과 YMCA 직원들이 불만을 가졌고, 조지 선교사가 여름 수양을 떠나자 종업원들이 집단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종업원들의 행패가 그치지 않아서 안익태는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안익태가 일본에 유학하게 된 것은 3.1만세운동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숭실학교는 평양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불과 14세에 지나지 않았던 안익태선생은 3.1운동 관련 수감자 구출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지목 대상이 되었고 숭실중학교 퇴교처분을 받게 됩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우리 박사는 그를 일본으로 유학하도록 주선해주어 1921년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서 첼로 특기자로 수학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그의 신앙은 더욱 돈독해지게 되었고 이후 1926년 도쿄 구니타치 음악대학에 진학하여 전문 첼로연주자의 길을 나서게 됩니다.
일본에 유학하며 공부하던 안익태는 수시로 평양에 돌아와서 숭실학교에서 음악과 체육활동을 하면서 숭실학교 선교사들과의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3. 안익태가 만난 애국가 가사
안익태가 신앙적인 음악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시기는 미국에 유학하면서입니다.
1930년 구니타치 음악대학 졸업 후 일시 귀국하여 수차례의 첼로독주회를 개최한 안익태는 25세가 되면서 첼로와 옷 보따리 한 개 들고 미국행 제퍼슨호에 오릅니다.
그는 이 배에서 미국에 도착하기까지 선상에서 첼로 연주회를 열었는데 많은 외국인이 몰려와 경청했고, 연주가 끝나면 그는 영어 성경책을 꺼내 열심 읽으면서 믿음을 쌓아갔습니다. 제퍼슨호는 기독교인을 위해 일요일마다 1등 선실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안익태는 이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한번은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데 한 백인 부인이 안익태를 불러세웠습니다. 그 부인은 갑판에서 첼로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며 여기 예배당에 모인 사람을 위해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기꺼이 이를 수락한 안익태는 찬송가를 연주했고 연주가 끝나자 한 백인 목사가 다가와 안익태를 1등 칸 자기 방에서 지내게 해 주었습니다. 그 목사는 예배 후 특별 헌금을 모아 안익태를 돕자고 참석자들에게 제의하여 당시에 거금인 300달러를 모아 안익태에게 유학자금으로 주었습니다.
안익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곧바로 한인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찾아간 교회는 교회라기보다 평양에 있는 선교사 사택 같았지만, 교회의 뜰에는 태극기가 게양대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돌아보고 미국이 엄청나게 발전된 것에 탄복했고 청교도 정신이 그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청교도 정신은 관용, 협동, 자비, 정의, 평화, 박애 등 기독교 정신이며, 미국인들에게 깊숙이 스며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안익태는 우리나라도 청교도 정신으로 해방되고 독립되어야 한다고 마음속 깊이 새겨둡니다. 그리고 그는 이 기독교의 청교도 사상을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로 삼아야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곳 한인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동포들과 같이 조국의 해방을 기원했고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과 함께 일어서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안익태는 이곳에서 처음 불러본 애국가 가사 가운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가장 자신의 가슴에 울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안익태는 생애 처음 <애국가> 가사를 알게 된 후 그 감격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곡조는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이었습니다. <애국가>를 외국 민요곡으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던 그는 우리의 <애국가>를 작곡하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1935년 드디어 오늘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부르고 있는 <애국가>가 탄생했습니다. 안익태의 <애국가> 악보는 이후 미국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안익태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 속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활발한 연주 생활을 하며 점차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깊은 믿음 속에서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애국심으로 ‘애국가’를 작곡하고, 이 이 애국가 곡조를 모티브로 세계적인 명곡이 된 <코리아 환타지> 교향곡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신시내티에 당도한 안익태는 그해 9월 신시내티 음악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1933년 2월에는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에 역시 장학생으로 편입하여 당대 대지휘자인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를 만나게 됩니다. 스토코프스키의 권유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습 단원으로 입단한 그는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할 정도로 첼리스트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관람하면서 지휘에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필라델피아 심포니 클럽과 앱나키캠프 관현악단 및 체스트넛 힐 장로교회 성가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지휘의 기초를 쌓게 되고 1935년 엘칸-보걸사의 의뢰로 <한국음악의 첫 선언> 모음곡을 출반하게 되면서 안익태는 첼리스트, 지휘자, 작곡가로 분방하게 활동합니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36년 6월 학업을 보류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대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와 만나서 교분을 쌓으며 유럽의 음악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안익태는 음악의 본고장에서 음악활동을 할 결심을 하게 되고 유럽활동시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다시 미국에 돌아가 템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자마자 유럽으로 건너가 1938년에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때 <애국가>를 모티브로 작곡한 <한국환상곡>을 처음으로 연주헀습니다. 같은 해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안익태는 1941년 10월 졸업할 때까지 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에서 당시 유럽에서 민족주의 음악인으로 유명한 헝가리 출신 코다이 졸탄과 도흐나니 에르뇌에게 작곡을 배웠고, 헝가리와 이탈리아, 독일,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유럽 각지의 관현악단들을 객원 지휘하는 등 지휘자로서 활동했습니다.
후에 안익태선생이 독일에서의 음악을 하게 만든 독일 후기낭만파 최후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와의 첫 만남도 1938년 4월에서 12월 사이 슈트라우스가 리스트 음악원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음악학교 연습실에서 그의 첫 교향곡 작품인 ‘강천성악’을 연습하고 있을 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마침 그 연습실 앞을 지나가며면서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동양적 음악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듣게 됩니다. “누가 지휘하는 건가?” 도대체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 거지?“ 라고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묻자 ”안익태라고 하는 조선인 학생인데 아마 자기 작품을 지휘하고 있는가 봅니다“라고 답변하자 슈트라우스는 연습실에 들어가서 그 음악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였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주저하지 않고 안익태를 자신의 수제자로 삼았습니다.
이런 안익태와 슈트라우스의 만남이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시비의 빌미가 됩니다. 슈트라우스가 친나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안익태를 정성을 다해 가르치며 그에게 유럽 음악 무대에서 활동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슈트라우스는 안익태에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연주회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부득한 일로 자신이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자기 대신 그 연주회 지휘를 부탁합니다. 안익태는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적 능력과 재능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제자들 가운데에는 그 유명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캬라얀이 있었지만 르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보다 안익태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하고 그를 자신의 수제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럽 음악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안익태를 환호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42년 3월 12일 빈 무지크 페라인잘에서 안익태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난 후, 객석에 있던 슈트라우스가 안익태의 지휘 실력을 깨끗이 인정한다고 쓴 친필편지를 전합니다. 이때로부터 1949년 9월 8일 슈트라우스가 타계할 때까지 8년간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유일한 동양인 제자로 작곡과 지휘를 사사 받았습니다. 1943년 안익태는 동양인으로서 처음으로 그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1940년대에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은 당시에도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휘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4. 안익태 친일과 친나치 문제
안익태 사후에 그를 괴롭힌 것은 친일문제입니다. 안익태가 창씨개명 했다는 주장과 독일 체류 당시 일본을 위한 음악회에서 지휘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하지만 안익태선생은 일본 유학 당시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세간에서 일본식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에키타이 안이란 표기는 한국어의 받침 발음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이 안익태를 안에키타이 Ahn Ekitai라고 임의로 받아쓴 것입니다. 이 발음이 서양인들에게도 용이한 발음표기로 받아들여져 에키타이 안으로 통용되었을 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는 에키타이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일제가 강제로 조선인을 창씨개명하도록 강요한 것은 1938년입니다. 당시 안익태는 미국과 유럽에서 음악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때이고 그의 일본 여권에는 Ahn Eaktai 였습니다.
또 다른 친일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독일에서 있었던 1942년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행사에서 <만주 축전곡>을 작곡하여 연주했고, <애국가> 모티브가 담긴 <코리아 환타지>가 이 <만주국 축전곡>의 표절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코리아 환타지>는 1938년에 작곡되어 유럽에서 처음 연주됐으며 <만주 축전곡>이 작곡되어 연주된 해는 1942년입니다.
오히려 안익태가 <만주 축전곡>이란 이름을 빌려 <코리아 환타지>에 담긴 우리 애국가를 유럽에서 널리 알린 셈이고 이런 시도야말로 일제 식민에서 조국의 해방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일종의 ‘음악적인 독립만세’라는 외침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런 해석은 해방 후 196년 일본의 NHK에서 그를 초청하여 <코리아 환타지>를 연주하게 했을 때 일본합창단들이 모두 한국어로 ‘대한 대한 만만세‘를 부르게 한 후, 이것이 본인이 꿈꾸던 일이었다고 말한 일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문재인 정부의 반일정책에 편승한 한신대학교의 어느 교수는 안익태가 독일에서 음악가로 활동할 때 제국음악원 회원이었고 베를린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친 나치 행위자가 아니면 독일에서 받을 수 없는 우대라고 주장하면서 연주회 지휘 사례비를 받은 것이 스파이 활동비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 음악원 회원은 독일에서 음악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가입하는 단체로 회원이 10만명이 넘었고 베를린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은 캬라얀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카랴얀은 나치주의자여서 전후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았으나 뛰어난 음악가라는 이유로 사면되어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영광을 누렸지만 세계인 그 누구도 캬라얀을 친 나치주의자라고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분명한 것은 안익태가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과 연계된 음악활동 기록은 있지만, 그가 어떤 방송이나 언론 매체, 혹은 사적인 편지에서 일본을 옹호한 기록이 없고, 한번도 반민족행위를 한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5. 안익태의 마지막 생애
안익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계속 유럽에 남아 활동했지만, 1944년으로 접어들며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자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연속 연주회를 마친 뒤 평소 친분이 있던 스페인 가톨릭교회 주교의 주선으로 6월에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기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마지막 시기인 스페인거주활동기가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1944년 12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환상곡>의 자필 악보를 완성했고, 1945년 리카르도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46년에 스페인 귀족 가문 여성인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11월에 창단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면서 스페인에 완전히 정착하였고,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스페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가톨릭국가이고 안익태가 스페인의 귀족 여성과 결혼하여 그곳에서 정착해야 하므로 같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그의 신앙에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청교도적 신앙이 조국의 희망이라는 그의 확신은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용한 섬 마요르카에 머물며 지휘와 작곡에만 몰두하던 안익태가 다시 고국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이었습니다. 고국의 현실에 몹시도 괴로웠던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개작해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개정판 <한국환상곡>을 1952년 최초의 멕시코 순회연주와 1953년 신시내티 교향악단 송년음악회에서 연주하면서 안익태는 조국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마침내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세 기념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해 25년 만인 1955년 3월 안익태는 귀국하여 <애국가>의 작곡가로 최초의 문화포장을 받았습니다. 이후 1959년 5월 마요르카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에서 물러난 안익태는 전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단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객원 지휘 활동에 나섭니다. 그가 지휘한 오케스트라는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럽과 미국, 중남미와 일본, 대만, 필리핀의 주요악단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안익태 만큼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단을 지휘한 자는 아무도 없고 심지어 20세기 최고 지휘자로 유명한 캬라얀 조차 안익태의 지휘 경력에 미치지 못할 정도입니다.
1960년 3월에는 이승만 대통령 탄신 85세 기념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해 5년 만에 귀국했고, 1961년 12월 다시 한국을 찾아 박정희 의장을 예방했습니다. 박정희 의장과의 면담을 통해 <서울국제음악제>를 추진하여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매년 5월에 음악제를 주관하면서 서울국제음악제 개최와 함께 국립교향악단 창설, 국립음악학교 설립 등 국내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당시부터 병세의 조짐이 완연해졌습니다. 1965년 5월 제4회 서울국제음악제가 무산되면서 충격을 받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안익태의 병세는 한층 심각해졌습니다.
같은 해 7월 4일 런던 로열 앨버트홀에서 영국 최고 악단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이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는데, 심한 고열과 통증에도 지휘를 강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간경화 진단을 받았고, 약 2개월 후인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영면하게 됩니다. 그해 5월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고국을 떠난 안익태의 갑작스런 죽음에 수많은 사람이 애통해했습니다. 정부는 안익태의 공로를 인정하여 사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안익태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지속적으로 유해봉환사업을 펼친 결과, 사후 12년이 흐른 1977년 7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