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음악가의 극일스토리 -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서문 발췌

작성자
ahneaktai
작성일
2019-08-14 10:21
조회
1954
어느 음악가의 극일 스토리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현대사의 출발점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지나며 대한민국은 또 다시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지금부터 140여 년 전, 청나라 외교관 황쭌센이 쓴 「조선책략」을 읽으면서 생존전략을 강구하던 그때처럼, 또다시 우리를 옥죄는 주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은 생존 전략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2017년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중국으로부터 경제 보복을 당한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일제강점기 피해자 배상을 둘러싸고 일본의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 규제로 한일 양국 관계는 물론 국민감정도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사태의 본질은 광복된 지가 70년을 넘고,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지 50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은 ‘친일 청산’ 작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의의 외침과 결기만으로 친일 청산을 이룰 수 없다는데 있다.

그동안 우리는 착시현상에 빠져 있었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통한 국력의 신장은 곧 일본을 능가할 것처럼 착각했는데, 이번 사태로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대일 의존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극일과 식민지 역사 청산은 실력으로 일본을 넘어설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도산이 “일본에 나라가 망한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 힘을 기르소서!”라고 외치던 음성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고사 성어에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말이 있다.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는다는 뜻으로 중국 한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의 얘기다. 그가 훗날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초왕이 된 후 옛날 시장거리에서 망신을 준 불량배를 찾은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망신줄 때 내게 그를 죽일 힘이 없었겠소. 만약 그때 모욕을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았다면 나는 죄인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거요. 큰 뜻을 품은 내게 그를 죽이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었소. 그래서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아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

이 같은 연유에서 생겨난 과하지욕(袴下之辱)은 ‘어려운 처지에서 참아낸 굴욕’이란 뜻으로 쓰인다. 큰 뜻을 지닌 사람은 쓸데없는 일로 옥신각신 다투지 않음을 빗대는 말이다. 한일협정 체결 이후 반세기동안 대일무역은 수출이 880배, 수입은 400배 증가하며 첨단기술 분야를 제외하면 이제는 일본과 어깨를 겨룰만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제인이 ‘과하지욕의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극일에 성공한 결과이다.

1942년 9월 18일 대형 일장기와 만주국 국기 밑에서 베를린교향악단과 「만주국 환상곡」을 초연하는 안익태의 모습이 얼마 전에 언론에 보도되어 「애국가」를 애창하고 사랑하는 애국시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60년 2월 안익태는 일본에서 간사이교향악단과 교토・오사카 등지의 관서지방을 순회하면서 「한국 환상곡」을 공연하였다. 이때 4장의 「애국가」를 연주하자 일본인 합창단원이 한국말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 4월 4일 도쿄에서 ABC교향악단과 「한국 환상곡」을 공연하였다. 대한민국이 독립하고도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으로 양국 국민들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있던 때였는데, 일본의 심장인 도쿄와 교토에서 그것도 일본인들이 부르는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이다.
3개월 동안의 동아시아 순회연주회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갔을 때, 안익태는 감격에 겨운 감정으로 로리타와 매우 의미 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여보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움을 느꼈소. 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고 언제나 고생을 참고 견디면 이에 대한 보상이 있기 마련이거든. 당신도 내가 한국에서 「한국 환상곡」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 여하튼 이 행복감을 좀 더 실감 있게 맛보기 위해서라면 전에 고생을 좀 더해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정도요.
한국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소. 가슴을 뿌듯하게 메우는 감격을 나로서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요. 그러나 내가 도쿄연주회에서 「한국 환상곡」을 지휘하면서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애국가」를 한국말로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 만족감이란 한국에서 느꼈던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야말로 최고의 감격적인 만족이었소. - 탈라베라 저, 장선영 역, 「나의 남편 안익태」, (신구문화사, 1974), pp.206-2

이것이 안익태에게 있어서 과하지욕(袴下之辱)이 아닐까? 만약 안익태가 그때 ‘지휘봉을 꺾고 지휘를 거부했더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이 요구대로 「만주국」을 작곡하고 대형 일장기 밑에서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입장이 반전되어, 이제는 일본인들이 그의 지휘봉이 움직이는 대로 한국말로 「애국가」를 합창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그야말로 ‘극일의 모범 사례’이다. 또한 일제의 ‘우민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축적하여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독립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려던 ‘문화적 민족운동’(신문화운동)의 성공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상황은 또다시 반전된다. 로리타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음악이란 사람들의 뜻을 합치게 함으로써 모두가 한 형제인 것처럼 서로 사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요.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오. 지휘봉을 드니까 두말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요. 결국 두 나라는 음악을 통하여 형제국이 된 거요. 이 점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이오. - 탈라베라 저, 장선영 역, 「나의 남편 안익태」, p.207.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음악은 세계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구’라는 그의 음악철학을 음미하게 하는 동시에 “동양 3국이 서로 화합하고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하자”라고 주장하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보통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평화주의자 안익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애국’과 ‘친일’이라는 이분법으로는 안익태를 재단할 수 없는 이유이다.

안익태는 정치인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삶과 예술을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다. 어린 시절 고향 친구로 필라델피아에서 동고동락하던 한흑구(본명: 한세광)는 1935년 <신인 문학>에 안익태를 모델로 단편소설 「어떤 젊은 예술가」를 게재하였고, 1974년에는 「예술가 안익태, 젊은 시절의 교우기」를 수필집 「인생 산문」에 발표하였다.

한흑구는 소박한 문체만큼이나 청렴한 성품으로 존경 받던 인물이었다. 문학평론가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일제 35년 동안 문학가라고 부를만한 사람 가운데 친일문학에 관계하지 않은 이는 김영랑 이육사 윤동주 한흑구 등 15명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한흑구는 안익태를 가리켜 “그는 첼로(음악)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한흑구의 말처럼 안익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음악이었으며, 정치나 생계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 책에서 필자가 1부 ‘안익태, 그는 누구인가?’에서 안익태를 바라보는 관점도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면서 예술을 사랑했던 한 ‘역사적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2부 ‘안익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서는『친일인명사전』에 친일행위자로 등재된 것도 모자라서 ‘친일을 넘어 친 나치’라고 공격하는 평가가 올바른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해방 후 조국과 관련한 행적에 관해서도 재평가를 시도하고 ‘역사적 공과’를 논할 것이다. 3부 ‘왜, 애국가를 바꾸려 하는가?’에서는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이어 「애국가」가 국가로서 정당한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에는 안익태를 ‘친일’ ‘친 나치’로 오도하면서 ‘애국가 바꾸기’를 주창해 온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에 대하여, 본 재단 연구위원회에서 지난 4개월 동안 검증을 내용을 부록으로 덧붙인다.
이전에 대학 강단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진하다가 이후 오랜 시간을 통일운동 현장으로 나가 외도하던 필자에게 ‘안익태 연구’의 도전을 던져준 사람은 90대 원로 언론인 김경래 선생이다. 2016년 봄 필자가 양화진으로 예방했을 때, 선생은 몇 권의 저서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 중에 <안익태 전기>가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익태에 관심을 갖던 중 금년 4월에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하게 되었다.
첫 번째 작업은 선행 연구를 검토하는 일이었는데,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할 김경래의 전기에는 글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아서 사료로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안익태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감동을 전해주는 데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필자가 짧은 기간에 안익태를 공부하고 나름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준 길라잡이는 전정임 교수의 「안익태」이다. 그 바탕에서 허영한 교수가 필생의 작업으로 진행하는 안익태 연구의 성과물들을 통해 살을 붙일 수가 있었다.
만약 이 책에서 두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둔다. 지난 3개월 동안 매주 토론회를 함께 하면서 도움을 준 연구위원회 임종권 박사・김승열 평론가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연구 활동을 지원해주신 안익태기념재단의 차응선 이사장과 이사들, 한헌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작은 책을 통해 음악가 안익태의 삶과 예술, 특히 대한민국 「애국가」가 올바르게 평가되어지기를 기대한다.
; 사장된 용어와 난해한 문장은 현대적으로 표기.

2019년 7월 1일
상도동 숭실대캠퍼스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실에서